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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거북바위 02.아미산 03.관덕정순교기념관 04.계산성당 05.대구향교
06.제일교회 07.약령시축제 08.건들바위 09.숙박시설 10.중구먹거리
지금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옛날 대구시 전역에는 나지막한 산들이 곳곳에 솟아 있었다. 그중 연귀산은 대구를 지켜주는 진산(鎭山)으로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대구향교 남쪽의 야트막한 언덕에 위치한 제일여중 교정이 바로 그곳이다. 현재 제일여중 교정 한구석에는 특이한 바위가 남아있어 연구산(連龜山)의 유래를 전해 주고 있다. 윗부분이 거북등처럼 떡떡 갈라진 이 바위는 일명 거북바위로 여러가지 유래가 정해진다.

옛날 대구에는 불이 자주 나 불과 상극인 물에 사는 거북을 상징하는 바위를 두었더니 그후로는 정말 불이 나지 않았다는 설, 옛 무덤인 고인돌의 일종이라는 설 등이 있으며, '연구산' 이라는 지명에 얽힌 전설은 기록상으로 남아 있다.
경상도 각 고을의 연혁과 풍물을 소개한 『경상도 지리지 대구편』에는 연구산과 거북바위에 관한 기록을 소상히 전하고 있다. 즉, 이 산에 돌로 거북을 만들어 머리를 남쪽, 꼬리를 북쪽으로 향하게 해 비슬산에서 뻗어오는 지맥을 통하게 했다. 그리고, 이 산을 이을연(連), 거북구(龜)로 하여 연구산으로 부르게 되었다.
연구산에서 조금 남쪽으로 내려선 곳에는 아미산이 있었다. 적십자 병원에서 반월당 네거리에 이르는 곳에 언덕을 이루었던 이 산은 여인의 눈썹처럼 생겼다고 해 아미산(娥眉山)이라 불렀다.옛날 이 일대에는 무과시험을 관장했던 관덕정이 있었으며, 무사들이 무예를 닦던 연변장이 있었다. 또 아미산 에는 국법을 어긴 중죄인을 처형하는 형장이 있었던 곳으로, 경상도 지역 천주교 순교자들이 무고한 생명을 잃은 곳이기도 하다. 대구대교구는 가톨릭 200주년 기념사업으로 관덕정 순교기념관을 건립해 순교자들의 뜻을 높이 받들었다.
 
 
반월당에 위치한 적십자병원 뒤편의 언덕은 아미산이라고 불렀다. 이곳이 아미산이라고 불린 이유는 두가지를 꼽을 수 있다. 아미라 함은 미인의 눈썹을 의미하는데, 경상감영에서는 남쪽산을 보면 야트막한 언덕이 미인의 눈썹을 닮았다하여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중구의 명산 아미산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는 것이다. 당시 중국의 아미현에 있던 산으로 보현보살이 발현한다하여 영험한 산으로 이름나 있었다. 이 근거로는 남산동 언덕에 자리 잡은 보현사를 들 수있다
 
 
세종대왕이 전국에 창건했던 '관덕정'은, '사자소이 관성덕야'라 하여 '활을 쏘는 것은 평화시에는 심신을 연마하고 유사시에는 나라를 지키는까닭에 이를 보는 것은 덕행을 보는 것'이라는 뜻이다. 관덕정은 목사가 앞 광장에서 연마를 지휘하고 사열하는 곳일 뿐만 아니라 관민이 함께 공사를 의논하거나 잔치를 베푸는 곳으로도 이용되었으며 죄인을 다스리는 현장이기도 했다. 입구에 황새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는 천주교 신자들을 사형시키는 도구였다. 아직도 돌형구에 불그스레함이 남아있다.

1997년 가톨릭대구대교구가 '천주교순교기념관'으로 다시 복원했다. 1864년 3월에는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가 처형된 곳이기도 하다.

관덕정 순교기념관은 동아쇼핑 건너편 적십자 병원 뒤편에 지하1층, 지상3층 건물로 지어졌다. 우리나라 전통적인 단층과 기와가 불교식 건축물 분위기가 아니냐는 가톨릭 쪽의 논란도 있었지만 '단층'과 '기와'는 종교를 떠나서 가장 한국적인 고급 건축양식임을 이해하고 공사를 계속, 꼭대기 대청마루에 올라가면 단청에 그려진 성신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앉은 모습이나 십자가 지신, 포도나무 등이 천주교는 전래지역의 토착적인 문화와 융화되는 우수한 종교적 관점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낸다.
건물 지하에 성인의 유해를 모신 성당과 생활전시실이, 1층에 흥선대원군의 척화비가, 2층에는 대구 유일의 성인인 이윤일 요한 성인의 자료와 누각이 있다.

운영시간(관덕정 ☎ 254-0151∼2 )
- 동절기 : 09:30-18:00
- 하절기 : 09:30-18:00

※ 월요일은 휴관이며 입장료는 무료
※ 동아쇼핑센터 건너 적십자병원 뒤편(동아쇼핑센터에서 적십자병원으로 도보 5분)

 
 
지정번호 : 사적290호

소유자 : 재단법인 대구구천주교회유지재단

소재지 : 중구 계산동 2가 71

시대 : 1918년

지정년월일 : 1981년 9월 25일

19세기초부터 대구에 천주교(天主敎)의 토착이 이루어지고 그것이 활발하게 전교(傳敎) 되었던 것은 1886년(고종23년) 한불조약(韓佛條約)이 체결된 후부터였다. 그러나 전교는 당시만 하더라도 은신하여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이 때 성당은 산나무골에 있었고 1888년 (고종25년)에 새방골(현 서구 상리동)로 옮겼다. 그 후 1891년(고종28년) 포교에 힘쓰던 바오로 신부가 은신생활에서 벗어나 대구로 옮겨오게 되었고 대구 본당이 설정되기까지 새방골에 임시성당을 마련했다가 1897년에 현재의 계산동에 한식목조십자형성당이 신축 되었으나 1900년에 이 건물은 소실되어 버렸다. 그래서 1902년 소실된 장소에 벽돌로 고딕식 건물로 준공을 보게 되었다. 이것이 영남지방에서의 최초 고딕식 성당이었다. 현재의 본당은 1918년에 증축된 것이다.
 
 
지정번호 : 문화재자료 1호

소유자 : 대구향교재단

소재지 : 중구 남산동 735-4

시대 : 조선시대

지정년월일 : 1975년 2월 5일

태조 7년(1398) 지금의 교동에 창건된 후 정종 2년(1400)에 소실되었으나 곧 재건되었으며,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다시 소실되었다. 그후 선조 32년(1599) 달성공원 근처에 이건(移建)되었고 선조 34년 선조 34년(1601) 중건되었으나, 선조 38년(1605) 다시 교동으로 이건되었다.
그러나 대구향교는 1932년에 또 다시 현위치에 옮겨지게 되었으며 1973년 에는 보수정화공사를 실시한 바 있다.
 
 
제일교회는 대구.경북 최초의 기독교 교회로 약전골목 내에 자리잡고 있다. 1897년(광무 1년)에 창건 되었으며 그후 교세가 계속 확장되어 1933년에 현재의 모습으로재건되었다.
초창기의 제일교회는 복음전파와 함께 제중원(동산병원의 전신)을 세워 의료활동을 펴 나갔으며, 대남학교, 신명여학교를 건립해 근대교육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제일교회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2층 건물로 전통가옥과 서구건축의 절충양식을 따르고 있다.

현재, 대구유형문화재 제30호로 지정되어 있다.
최근에는 동산동에 새 교회가 건립되어 신도들이 모두 그 건물로 옮겨갔으며, 이 건물은 '교육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 제일교회 보존회 ☎256-5412
 
 
대구약령시는 전국의 한약재가 집산하던 조선시대 대표적 특설시장의 하나이다. 효종(1650 - 1659)때 경상감사의 객사주변에서 봄과 가을에 정기적으로 열려왔던 개설시장으로 일년중 춘령시(음력 이월 초하루부터 그믐까지), 추령시(음력 동짓날 초하루부터 그믐까지)로 두 번 열렸다. 350여년 동안을 거치면서 약령시는 한약재 공급의 중심지가 되었고, 약전골목은 우리 선조들의 한약에 대한 슬기가 스며든 문화유적지가 되었다. 그리고 1978년부터 매년 대구약령제가 지역문화축제로 열려 대구시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 대구약령시의 창설 및 역사에 대한 정통적인 학설을 어느 한편에서 단정짓기란 매우 어려울 듯 쉽다. 다만, 기존의 연구에서 대구의 약령시의 명명은 조선왕조가 중국에 바칠 조공용 약재를 모으기 위하여 효종 9년(1658)에 국왕의 명령으로 창시되었다는 설과 1640년 전후 일본 덕천가강의 요청에 의해 령으로 개설되었다는 설 등이 통설이다.
그렇지만, 영남대 권병탁 교수는 그의 논문 대구약령시의 보건경제사적 고찰에서 약령시가 대청 조공용 약재조달을 위하여 국방의 명령에 의해서 창시되었다는 이른바 명령성을 부정하고, 약령시는 춘추계절시가 아니었던가 하는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아무튼 대구의 약령시의 역사는 약 300여년의 긴 세월과 더블어 발전하여 왔음이 분명하다.
 
 
건들바위는 옆절벽과 더불어 대구분지의 지반구조를 잘 나타내어 주는 바위이며 그 이름의 유래는 잘 알 수는 없으나 그 모양이 삿갓쓴 늙은이 같다해서 삿갓바위(笠巖)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다.


200여년전만 하더라도 이 바위 앞에는 맑고 깊은 냇물이 흘러 낚시를 하며 즐겼던 좋은 명소로 알려져 있다. 즉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는 서거정선생의 대구십경의 하나로서 입암조어(笠巖釣魚)의 시제가 바로 이곳을 두고 읊은 것이다.조선 정조1년(1776) 대구판관으로 부임한 이서가 이 일대의하천범람을 막기 위해 제방을 만들어 물줄기를 신천으로 돌렸기 때문에 물이 흐르지 않던 것을 '94. 12.23 "건들바위 종합조경공사"로 분수와 폭포를 설치, 물이 흐르도록하여 옛정취를 그대로 느낄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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